뤼순 감옥에서 쓴 여덟 글자 — 그 족자가 11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 일본에서 환수해 2025년 11월 국내 반입 완료
· 뤼순 초대 형무소장이 최초 소장한 역사 자료
뤼순 옥중의 마지막 붓질, 116년 만의 귀환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순국하기 며칠 전 중국 뤼순 감옥에서 남긴 유묵 ‘만국공법불여대포(萬國公法不如大砲)’가 116년 만에 일본에서 환수돼 고국에서 처음 공개됐다. 세월의 무게를 간직한 족자를 조심스레 펼치자 힘을 머금은 여덟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박정혜 이사장은 이번 공개 행사에서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 없던 특유의 힘 있는 필세는 안 의사의 숭고한 의연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 유묵은 재단이 2025년 5월 일본 현지 협력망을 통해 존재를 처음 확인한 뒤, 국가유산청과 복권 기금의 지원을 받아 같은 해 11월 국내 반입에 성공한 것이다.
‘국제법이 대포보다 못하다’ — 여덟 글자의 뜻
‘만국공법불여대포’는 직역하면 ‘만국공법(국제법)이 대포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제국주의 열강이 군사력으로 약소국을 지배하던 시대상을 압축한 표현으로,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직접 선택해 붓으로 남긴 문구다.
경기대 예술대학 장지훈 교수는 이 문구의 배경에 대해 “전쟁을 수행한 포로이므로 만국공법으로 재판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단순 살인죄로 기소해서 사형을 선고한 데 대해서 안 의사는 국제법의 무력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제국주의 국제 질서에 대한 안 의사의 비판 의식이 여덟 글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만국공법은 당시 국제법의 통칭으로, 전시 포로의 권리와 재판 절차 등을 규정한 국제 규범이었다. 안 의사가 이 규범에 근거해 재판을 요구했으나 일제가 끝내 거부했다는 사실은, 이 유묵의 문구 선택이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안 의사 본인의 직접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하얼빈 의거에서 뤼순 수감까지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후 중국 뤼순의 관동도독부 감옥에 수감돼 일제의 재판을 받게 됐다.
안 의사는 자신의 행위를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수행한 정당한 전쟁 행위로 규정하고, 국제법에 따른 군사재판을 일제에 요구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단순 살인죄로 기소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번 유묵은 그 판결을 받은 뒤 1910년 3월 26일 순국하기 며칠 전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가 거부한 포로 재판 요구의 의미
안중근 의사가 요구한 만국공법 재판은 단순한 법리 다툼이 아니었다. 의거의 성격을 개인 범행이 아닌 군사 행위로 규정함으로써, 대한의군의 독립 전쟁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제가 이 요구를 거부하고 단순 살인죄를 적용한 것은, 안 의사의 행위를 국가 간 전쟁 행위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판단이기도 했다. 장지훈 교수는 이러한 맥락에서 ‘만국공법불여대포’라는 문구가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안 의사가 직접 경험한 국제법의 한계를 응축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손도장과 뒷면 기록이 더하는 역사적 가치
이번 유묵의 특징 중 하나는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장인·掌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는 점이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남긴 작품에 장인을 찍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으며, 이는 유묵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로 꼽힌다.
족자 뒷면의 기록도 눈길을 끈다. 하얼빈 의거부터 사형 집행까지의 경과가 상세히 적혀 있고, 최초 소장자와 이후 전승 경로까지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전문가들은 이 뒷면 기록이 유묵 자체의 서예 가치에 더해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크게 높인다고 평가했다.
최초 소장자 — 뤼순 초대 형무소장
족자 뒷면의 기록에 따르면 이 유묵의 최초 소장자는 뤼순 감옥의 초대 형무소장이다. 장지훈 교수는 “처음 소장자는 뤼순 감옥의 초대 형무소장이었다”며 “사형 선고 기일을 또 미뤄달라고 부탁도 하고 안중근 의사를 굉장히 존경했던 인물”이라고 밝혔다.
적국 감옥의 최고 책임자가 사형수의 집행 연기를 요청했다는 사실은,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신념이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인상을 남겼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된다. 유묵은 이 형무소장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고, 이후 수십 년간 개인 소장 상태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역사적 행적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하영 증조부 안상호 친일 논란처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역사적 선택이 현재에도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환수 경위 — 2025년 5월 발견, 11월 국내 귀환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2025년 5월 일본 현지 협력망을 통해 이 유묵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후 국가유산청과 복권 기금의 지원을 통해 협의를 진행했고, 같은 해 11월 국내 반입에 성공했다. 발견부터 환수까지 약 6개월이 걸린 셈이다.
| 시기 | 사건 |
|---|---|
| 1909년 10월 |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 저격 및 현장 체포 |
| 1910년 3월 26일 | 뤼순 감옥 순국 (유묵은 그 며칠 전 제작) |
| 2025년 5월 |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일본 현지 협력망 통해 유묵 존재 최초 확인 |
| 2025년 11월 | 국가유산청·복권 기금 지원으로 국내 반입 완료 |
박정혜 이사장은 116년 만의 귀환이라는 점을 이번 공개 행사에서 강조했다. 재단은 앞으로도 국외에 소재한 한국 문화유산의 환수 활동을 지속하겠다는 방침이다.
문화재 환수의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
이번 유묵 환수는 국외 소재 한국 문화유산 반환 사업의 성과 사례로 평가된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국가유산청, 복권 기금이 협력한 구조는 향후 유사한 환수 사업에서 참고할 수 있는 사례라는 분석이 나온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국내외에 상당수 전해지고 있으나, 이번처럼 전승 경위가 뒷면에 상세히 기록된 사례는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록이 향후 학술 연구에서 중요한 1차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영화 ‘암살’ 속 친일파 강인국의 실제 모델 논란에서 보듯, 일제강점기를 둘러싼 역사 자료와 기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여전히 높다.
이번 유묵은 국내 첫 공개를 계기로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사상을 다시 돌아보는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출처: Y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