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초상 국보 승격 불발: 소유권 분쟁으로 멈춘 570년 유물

570년 초상화, 국보 한 발 앞에서 멈췄다

· 지정예고 후 국보 승격 무산, 현행 제도 시행 이래 처음 기록
· 문중 관리자 ‘수백억짜리 왜 기증하나’ 발언 파문
· 원본은 영당 밖으로 이전, 현재 모사본만 걸려 있어

1977년 보물로 지정된 ‘신숙주 초상’이 국보로 승격될 기회를 잃었다. 국가유산청이 2024년 7월 국보 승격을 공식 예고했지만, 문중 내 소유권 분쟁으로 6개월 기한 내 후속 절차가 완료되지 않으면서 심의 시효가 지나버린 것으로 20일 확인됐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지정예고 이후 국보 승격이 무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가장 오래된 공신 초상, 그 문화재적 위상

신숙주 초상은 조선 전기 문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를 그린 초상화로, 1455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로 109.5㎝, 세로 167㎝ 크기의 비단 채색화이며, 충북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구봉영당(龜峰影堂)에 봉안돼 전해졌다. 국가유산포털 상의 소유자(관리자)는 고령 신씨 문중으로 등재돼 있다.

2024년 국가유산청은 국보 승격 예고 이유로 “가장 오래된 공신 초상으로, 제작 당시 원형을 비교적 충실하게 보전하고 있어 미술사적·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점을 명시했다. 동산문화유산분과위원회는 2023년 전문가 조사를 토대로 소유자 측이 보관·관리방안을 제출하는 것을 조건으로 조건부 가결 결정을 내렸다.

조건부 가결에서 무산까지: 6개월의 공백

국보 지정 절차에 따르면, 지정예고 이후 일정 기한 내 소유자의 후속 조치가 이뤄져야 최종 심의가 완료된다. 신숙주 초상의 경우 6개월 기한 내 소유자 측의 보관·관리방안 제출이 이뤄지지 않아 심의 시효가 지나버렸다.

당시 담당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문중 내 소유권 분쟁으로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심의 시일이 지나버렸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정책과는 재접수가 이뤄지면 심의를 재개하겠다는 방침임을 밝혔다.

분쟁의 구조: 대종회 대 소안공파

갈등의 핵심은 영정의 실질적 관리 권한을 누가 갖느냐는 문제다. 한쪽은 고령 신씨 대종회(大宗會·종중의 중앙 조직)이며, 다른 쪽은 현재 초상화를 실제로 소장·관리하고 있는 신모씨다.

대종회 측 신원식 청주향교 전교(典校·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신숙주 초상은 본래 경기도 양주(현 의정부시 고산동)의 신숙주 종손 집안에 전해지다가 1920년 16대 종손(봉례공파)이 청주로 낙향하면서 소안공파가 보관·관리를 맡게 됐다. 신 전교는 종친회 총회가 국보 승격에 협조하도록 결의했음에도 신모씨가 “훼방 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모씨는 소안공파 종손의 작은아버지로, 영정 관리를 맡은 기간은 약 6년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서에 따르면 신모씨는 “우리 문중에서 대대로 관리해 왔는데 느닷없이 대종회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의 점검 절차를 잘 따라왔고 현재도 문제없다”고 진술했다. 신모씨는 20일 통화에서도 “소송도 무혐의 처분으로 끝났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경찰 수사와 불송치 결정

문중 갈등은 법적 절차로 확대됐다. 2024년 고령 신씨 대종회가 청주시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고, 2025년에는 청주상당경찰서가 신모씨를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조사했다.

경찰은 그러나 “국가유산청 정기조사(2022년)와 과학조사(2023년)도 문제없이 이뤄지는 등 피의자가 신숙주 초상을 은닉·손상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해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신모씨는 이 결정을 근거로 자신의 관리가 적법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원본은 영당 밖으로… 제사 때도 모습 감춰

현재 구봉영당에는 신숙주 초상의 원본이 없다. 분쟁이 불거진 이후 신모씨가 원본을 다른 곳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는 모사본(복제품)만 걸려 있는 상태다.

신 전교는 “청주시에서 구봉영당에 2억원을 들여 CCTV 등도 설치해줬는데 그 사람이 초상화를 가져가서 작년부터 향사(종친회의 큰 제사) 때도 안 가져온다”고 밝혔다. 종손 측은 항온·항습 및 도난 방지 차원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자는 입장이나, 신모씨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신 전교에 따르면 신모씨는 통화 중 “이게 수백억짜리인데 왜 국가에 기증해야 하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밝혔다. 신모씨는 20일 통화에서 이 발언에 대한 직접 확인을 거부했다.

앞서 초상화 전시를 위해 고령 신씨 문중과 접촉했던 김혜원 국립대구박물관장은 “국보급 유물의 현상태 확인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분쟁 경과 일지

시점 주요 사건
1977년 신숙주 초상, 보물 지정
2022년 국가유산청 정기조사 실시, 이상 없음
2023년 동산문화유산분과 전문가 과학조사 진행
2024년 7월 국가유산청, 보물→국보 승격 예고(조건부 가결)
2024년 대종회, 청주시장에 진정서 제출 / 6개월 기한 도과로 심의 무산
2025년 청주상당경찰서, 신모씨 수사 → 불송치 결정
현재 원본 소재 불명, 구봉영당에 모사본만 걸려 있음

국가지정문화유산의 소유권 이전 법적 구조

국보·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유산도 매매·증여·상속에 따른 소유권 이전은 가능하다. 다만 소유자가 바뀌면 국가유산청장에게 신고해야 하며, 국보·보물의 국외 반출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종손 측이 제안하는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은 법적으로 가능한 선택지이지만, 소유권 귀속이 먼저 명확히 정리돼야 실행이 가능하다.

재접수 가능하지만, 선결 과제는 소유권 정리

국가유산청은 재접수가 이뤄지면 심의를 재개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문중 내 소유권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재접수 자체가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보급 유물의 원본이 공인된 장소를 떠나 사적 보관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문화유산 관리 감독 체계의 사각지대가 드러난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신모씨는 20일 통화에서 “국보 승격 그딴 건 모르는 일”이라고 밝혔다. 570년 전 제작된 최고(最古) 공신 초상의 국보 지정 여부는 문중 내부 합의의 향방에 달려 있는 상황이다.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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